사랑의 빚
새해를 맞으며 기대하고 계획하는 일들이 많지만 지나간 일들을 아쉬워하게 된다. 얼마전 한 작가가 옛 것은 잊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애용하던 향수를 찾아 헤맨 이야기를 적은 기사를 보았다.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만 옛 것이라고 다 보내고 다 잊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. 간혹 가다 옛 사람 옛 것을 추억하며 센티멘탈할 수 있는 순간도 있어 인생이 더 풍요해 지는 것 같다. 아버지의 마지막 생신에 아버지가 과거 애용하시던, 더 이상 팔지 않는 향수를 드리고자 각방으로 노력하다 결국 찾지 못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찾게 되어 그 향기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발견했다는 글을 보며 떠오른 것은 모리츠 (Moritz) 라는 식당이다.
이 식당은 내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많이 담겨 있는 곳이다. 대학가 콘도 빌딩 1층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돌아가면서 전시하고 한 켠에서는 누군가 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비틀즈 노래를 많이 연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. 어떤 음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 외식 경험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그 식당에 가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우아한 곳에 가는 것 같은 행복감을 주었었다. 이 식당을 내게 처음 소개해준 사람은 애칭이 디디 (Dee Dee) 라는 대학 선배였다. 고등학교 여름 방학때 불어 연수를 갔다가 만난 몇살위의 멋쟁이였는데, 사교적으로 서투른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친 언니처럼 보살펴 주었었다. 나중에 내가 본인이 다니는 대학에 지망하게 된 것을 알고 대학 방문을 갔을때 이 모리츠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사주었었다.
디디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추고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는데다 머리도 아주 좋아 나는 늘 그녀에게 감탄했었다.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디디가 좋아하고 소개해준 식당이라 모리츠는 내게 특별한 곳이 되었던 것 같다.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디디는 사실 근육이 후퇴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. 유전병이라 친척중 두명이 그 병으로 죽었고 본인도 휴학을 하기도 하고 물리 치료등을 받으며 늘 병과 싸우고 있었다. 당장 몇년안에 죽을 병은 아니었지만 언제 악화될 지 몰라 미래를 계획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었다. 디디는 그런 중에도 늘 무엇인가 내게 베풀어 주고 새로운 경험을 주려고 했는데 나는 아직 사회 물정이나 대인 관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고마워 하면서도 감사의 표현조차 제대로 못했었다.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 되었던 적이 많은 것 같다.
디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. 의대생과 사귀고 있었는데 건강때문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다 결혼에 이르렀고 다른 도시로 이사간 후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카드까지 받았었다. 이후 서로 이사를 거듭하다 연락처를 잃게 되고 그녀의 소식도 끊겼다. 그녀를 찾아 보려고 의사 디렉토리로 남편이름을 찾아 보기도 했는데 연락처를 알 수가 없었다. 내가 대학을 다시 방문할 일이 있을때 마다 찾아 가던 모리츠 또한 어느날 연락해 보니 문을 닫았다. 대학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던 모리츠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큰 것은 디디 처럼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이들에게 진 사랑의 빚을 더 이상 갚을 수 없게 된 것이다. 개중에는 아직도 연락이 되고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이들도 있지만 너무 많은 이들과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. 세월이 가면서 사랑의 빚의 무게도 더 늘고 있다. 억울했던 일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분은 시간이 가면 잊혀 지는데 사랑을 받고 미처 보답하지 못한 미안함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. 그분들을 찾아 볼 수 있는 확률이, 이제 와서 제대로 감사를 표현할 만한 방법을 찾을 확률이 점점 더 줄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.
그래서 올 겨울에는 감사한 분들에게 더 늦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. 또 새해에는 직접 갚지 못한 사랑의 빚을 간접적으로 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. 그래야 디디를 추억할 때 미안함 보다 고마움이 더 클 것 같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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